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김일성]]과의 관계 === 북한과 단독 수교국이었던 특성상 여러 번 정상회담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다져나갔지만, 이는 겉치레였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소련 지도부는 김일성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제2세계]]가 아니라 [[제3세계]]국가로 행동했고, 소련이나 동유럽과 우호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제3세계권 [* 대표적으로 [[이집트]]가 있다. 이집트는 1980년대이래 친미외교를 펴지만 김일성 생존 당시에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원조해준 북한과의 의리를 지켜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과 공조를 하면서 중소 양국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면서 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뜯어냈고, 중소 양국도 북한을 상대하는 것을 까다롭게 여겼다. 1970년대에 북한은 친중외교를 펼쳤고, 브레즈네프는 데탕트 체제를 통해 미국과의 긴장완화에 주력했는데 북한은 이에 아랑곳 없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로 미국과 긴장을 고조시켰기 때문에 소련은 북한을 외교적 골치거리로 여겼다.[* 이 때 미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던 남한의 [[박정희]]는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검토했고 소련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화답한 적이 있었다. 미국만 믿을 수 없었던 당시 유신 정부와 북한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소련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히며 지연되었고 결국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으로 소련과 한국의 관계는 다시 냉각되어서 무산되었다.] 다만 1970년대 말 [[지미 카터]]가 집권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검토하자, 북한측도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군사도발을 자제하여 1970년대 말부터는 데탕트를 추구하는 소련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에 맞춰 1970년대 말부터 [[중미관계]]가 좋아지면서, 다시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이를 틈타 브레즈네프의 말기에는 북한과 소련은 사이가 좋아진다. 이때 북한은 소련의 최신예기인 [[MiG-29]]를 도입 약속을 받아내며 1987년 결국 도입되어 한국 공군은 긴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